삼한시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토대로 남해군을 변한 13개국 중 군미국(軍彌國) 또는 낙로국(樂路國)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이병도 박사의 학설이 정설이다.

가야시대

금관가야(金官伽倻 : 김해) ‧ 대가야(大伽倻 : 고령) · 소가야(小伽倻 : 고성) · 아라가야(阿羅伽倻 : 함안) · 성산가야(星山伽倻 : 성주) · 고령가야(古寜伽倻 : 성창=진주) 중 가장 가까운 진주에 있었던 고령가야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562년(진흥왕 23) 이사부가 가야를 멸망시키자 신라에 복속되었다. 663년(문무왕 3) 2월 백제의 저항세력이 남아 있던 거열성(거창)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킨 후 거열주(居列州)라 하였다. 거열주는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 : 지금의 진주)로 개편되었는데 전국 9주 중 하나로 남해군도 거열주의 속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1018년(현종 9)에 제대로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남해는 남해현으로 개칭되고 현령을 두었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지리지 권 57, 권제 11, 지리 2편에 나온다. 또한 고려말 남해는 극심한 왜구의 침탈로 1358년(공민왕 7)에 주민이 땅을 잃어 진주관내의 대야천부곡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1358년(공민왕 7) 대야천부곡에 관아를 임시로 옮겨다가 1404년(태종4)에 복구된 남해현은 1414년(태종 14) 군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동현을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으로 개칭되었다. 1414년(태종 14) 하동현이 독립하면서 진주임내 금양부곡을 남해현에 합하여 해양현이라 했다. 1417년(태종 17) 금양부곡이 진주에 다시 합병되어 남해현으로 독립되었다. 1419년(세종 원년) 진주에 속해 있던 곤명(昆明)을 남해현에 병합시켜 곤남군(昆南郡)으로 삼았다가 1437년(세종 19) 다시 남해현으로 독립했다. 남해현으로 복현된 후 458년간 지속되던 명칭은 1895년(고종 32) 남해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현내면으로 불리던 남해읍은 차산리, 선소리, 심천리, 오동방리, 평고개리(평현), 금동리(외금·내금), 광포리, 평리, 남산리, 성북리(서변), 교동리(유림), 아산리, 죽산리, 입고개리(입현), 방포리(섬호) 등 15개 방리(坊里)를 두고 있었다.

현대

1906년 9월 24일 현내면을 읍내면으로 개칭하였다. 1912년 11월 일제의 면제 공포와 함께 읍내면을 남해면으로 개칭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개칭된 남해면은 1979년 5월 1일 남해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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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남해읍행정복지센터 총무팀(☎ 055-860-8001)
최종수정일
2022-12-12 1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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